전문직은 '값'이 아닌 '가치'로 존립한다
홍정은 약사(약준모 홍보위원장)
전문직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다. 의사와 변호사, 교사, 그리고 약사에 이르기까지, 전문직은 고도의 지식과 윤리적 책무를 바탕으로 사회의 신뢰 위에 서 있다. 이들의 역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각 직역 고유의 전문성과 배타성이다. 이 배타성은 결코 특권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최근 등장한 이른바 ‘창고형 약국’은 이러한 약사의 정체성과 전문성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약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성분과 용량을 조절하고, 복용 기간과 병용 여부를 고려해 제공되어야 하는 의료 행위의 일환이다.
그러나 창고형 약국은 약을 오직 가격과 물량 중심으로 취급하며, 약사의 역할을 유통 마진과 효율성의 논리로 축소시킨다. 약국이 단순한 판매 채널로 기능하게 될 때, 약사는 조언자나 판단자가 아닌 단순한 판매자가 된다.
의약품은 생수나 생필품처럼 싸게 많이 쟁여두는 ‘쟁여템’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약가는 지난 수십 년간 물가 상승률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해 왔으며, 치료 접근성도 이미 충분히 확보된 상황이다.
오늘날의 과제는 가격이 아니라, 정보의 과잉 속에서 환자에게 가장 적합한 약을, 가장 적절한 조합으로, 최적의 기간 동안 안전하게 복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약사는 이러한 판단과 조율의 역할을 약가의 실질적 정체와 약료 서비스료 감소 속에서도 묵묵히 수행해 왔다.
동시에, 약사는 지역사회에서 ‘가장 가까운 전문가’로서 1차 접점의 공공적 기능을 수행해 왔다. 수많은 지역 약국은 극히 제한된 마진과 좁은 상권, 긴 노동 시간 속에서도 복약지도와 건강 상담을 제공하며 의료 시스템의 말단을 지키고 있다. 겉보기에 느슨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 구조는, 실은 공공성을 지탱하는 마지막 마지노선이었다.
그러나 창고형 약국은 이 고리를 끊으려 한다. 철학 없는 가격 경쟁에 스스로를 내맡기고, 약을 공산품처럼 진열하며, 약사의 전문성을 스스로 지우는 모순에 빠져 있다.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실상은 환자와 전문가 간의 관계를 시장 논리로 대체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사업 모델의 실험이 아니라는 점이다. 창고형 약국은 대자본이 약국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구조적 사다리가 될 수 있다. 유통 구조를 단순화하고, 가격 논리를 강화하며, 약국을 표준화된 판매 공간으로 재편하는 이 흐름은 대기업 진입에 최적화된 조건을 제공한다. 지금은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을 수 있겠지만, 대자본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는 순간 가장 먼저 밀려나는 것은 다름 아닌 이들 자신일 것이다.
약국은 단순한 유통 채널이 아니다. 약사는 약료 전문가이며, 약은 판단과 책임으로 다뤄져야 한다. 창고형 약국은 그 모든 맥락을 지워버리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스스로의 존립 기반을 허무는 결과로 되돌아올 것이다. 시장을 흔드는 손이 커질수록, 먼저 흔들리는 쪽은 언제나 가장 먼저 나선 쪽이다.
지금 약사 사회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왜 약사가 되었는가. 약사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단기적 유행과 자극적인 실험에 흔들릴 것이 아니라, 약사의 철학과 직업적 존엄을 지킬 수 있는 구조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전문직은 결국, 돈이 아닌 철학으로 존립한다. 그리고 그 철학이 무너지는 순간, 약사는 더 이상 전문가로 존재할 수 없다.

















